우리는 누구인가
패턴플로우의 일원이라는 것
오늘 프리야 파커의 『모임을 예술로 만드는 법』을 절반쯤 읽다가, 계속 외면하던 문제를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패턴플로우 커뮤니티는 지금 죽어 있다. 오롯이 내 책임이다. 회주로서의 책임을 외면해 왔다. 그냥 자료만 공유하고 놔두면 알아서들 만들고 참여하리라 기대했다. 자유방임이다. 패턴플로우가 자료를 공유하는 데서 멈추는, 그저 그런 오픈소스 프로젝트로 끝나도 괜찮다면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패턴플로우를 예술로 만들고 싶다. 어쩌면 이게 미디어아트의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프로젝트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하고, 그걸 이끌어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야 한다.
그래서 회주의 의무를 다시 생각한다. 파커가 책에서 말하는 건 분명하다. 좋은 호스트는 손님을 위해 기꺼이 권위를 쥔다. 규칙을 세우고, 방향을 정하고, 강하게 운영하는 것이 오히려 배려라는 것. 자유방임은 겸손이 아니라 방치였다. 신경 쓰기 힘들기에 방치를 겸손이라 여기고 책임을 회피해 왔다. 이제는 관대한 권위를 가지려 한다.
우리는 왜 모이는가
먼저, 패턴플로우는 오픈소스 LED 신디사이저이고, 인터랙티브 미디어아트의 대중화를 이끌고자 한다. 다만 이건 제품에 대한 설명에 가깝다. 단체의 목표라기엔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다. 그래서 패턴플로우에 모인 사람들로 인해 세상에 어떤 변화가 생기면 좋을지 고민해 보았다.
길을 걷다 보면 굉장히 많은 LED 패널을 본다. 거기 나오는 그래픽은 대개 잠들어 있다. 글자와 깜빡임만 있는, 정보 전달용 간판에 가깝다. 멋진 효과를 얼마든지 넣을 수 있는데도 따분하게 방치돼 있다. 이 공백과 낭비를 문제로 보고, 패턴플로우가 풀어버린다면 어떨까. 세상의 모든 LED 패널을 해킹해서, 멋진 그래픽으로 감염시켜 버린다면. 그래서 패턴플로우라는 단체에 목표를 하나 더한다. "세상의 모든 LED 패널을 멋진 그래픽으로 감염시키자." 물론 미디어아트의 대중화를 버리는 건 아니다. 둘은 같이 간다. 다만 단체에는 더 구체적인 그림이 필요했고, 나의 직관으로는 그 모습들이 그려졌다.
들어올 사람들
이 글을 쓰기 전에 패턴플로우 웨이트리스트를 정말 오랜만에 다시 살펴봤다. 대략적으로 이런 사람들이 와 있다. 먼저, 원래부터 미디어아트에 깊이 발 담그고 있던 사람들. 터치디자이너로 제너러티브 아트를 만드는 등 자신만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이미 자기만의 도구와 작업이 있고, 패턴플로우를 거기에 꽂아 쓰려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람들. "코딩은 처음인데 이걸 학습 프로젝트로 삼고 싶다"는 사람, "코로나 때 납땜을 시작해서 첫 PCB를 막 만들어보고 신세계를 발견하는 중"이라는 사람. 이들이 어쩌면 더 소중하다. 왜냐면 패턴플로우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게, 바로 이 사람들이 쉽게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니까. 이 두 부류가 한 방에 있다. 만드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좋다.
어떻게 같이 할까
패턴플로우가 사람들에게 하나의 게임처럼 다가가면 좋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가에 재미로 하는 활동. 그러면서 서로 유대감과 성취감을 느끼는 장소. 이런 장치들은 차차 만들어갈 거다. 예를 들면 레벨이 올라가거나 전직을 하거나… 게임을 좋아하지만 접은 지 오래되어서 자꾸 게임처럼 만들고 싶다.
그리고 무엇을 어떻게 열고 닫을지, 그 선도 분명히 해 두고 싶다. 패턴은 활짝 열려 있다. 현재의 AI 기반 패턴 생성을 핵심으로 가져가되 계속 업그레이드할 거다. AI를 계속 돌려보면 대부분은 비슷비슷한 게 나오지만, 가끔 생각지도 못한 창의적인 패턴이 튀어나온다. 거기서 영감을 얻어 다듬으면 좋은 패턴이 된다. 그 위에 이미지나 영상을 코드로 바꿔 얹는 후처리도 있다. 레이어링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이미지나 영상만 있는 건 패턴플로우라고 보지 않는다. 노브와 연결된 파라미터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뀌는, 코드로 작동하는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영상을 통째로 쓰더라도, 그 위에 글리치 같은 효과를 노브로 얹는다면 그건 패턴플로우다. 핵심은 손끝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 이건 우리의 정체성이다. 이 선 안에서는 마음껏 해도 된다. 자세한 건 따로 더 정리해 두겠다.
하드웨어는 조금 다르다. 수정하고 쓰는 건 얼마든지 자유다. 다만 그걸 판매하거나 패턴플로우의 공식 모델로 편입하는 건 다른 얘기다. 여기는 신중해야 하고, 내 견해가 많이 들어갈 거다. 사용성이나 호환, 펀딩 같은 게 걸려 있어서 코어는 지켜야 하니까. 그럼에도 하드웨어에서의 실험을 바라는 마음도 분명히 있다. 만들어본 것들을 편하게 자랑해주길 바란다.
솔직히 여기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할지. 그치만 하다 보면 길이 보이겠지. 이런 것들을 나 혼자 정하고 싶지는 않다. 방향은 내가 제시하겠지만, 무엇을 만들고 무엇을 열지는 함께 이야기하며 조율하고 싶다. 당장 웨이트리스트만 봐도, 내가 결이 안 맞는다고 뺐던 기능(영상을 LED용으로 굽는 것)을 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보는 패턴플로우와 남이 보는 패턴플로우는 다를 수 있다. 그 간극을 같이 좁혀가고 싶다.
3년 뒤
가끔 3년 뒤의 패턴플로우를 상상한다. 내가 만들지 않은 길드가 여럿 생기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끼리 서로 가르치고, 누군가 어느 도시의 가게 간판을, 또 누군가는 클럽의 벽을 패턴플로우로 감염시키고 있는 모습. 그때쯤 패턴플로우는 더 이상 나만의 것이 아닐 거다. 그게 무섭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통제를 놓는 걸 가장 어려워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요즘 드는 생각은, 내가 정말로 갖고 싶은 건 "내가 멋진 작품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아니라,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장을 만들었다"는 것 같다.
그래서, 지금
긴 이야기를 했지만 지금 당장 부탁하고 싶은 건 딱 두 가지다. 하나, 자기소개를 해 달라. 곧 디스코드에 자기소개 채널과 간단한 양식을 만들고 안내할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패턴플로우로 뭘 하고 싶은지. 만들러 왔는지, 배우러 왔는지, 자기 작업에 쓰러 왔는지. 그거면 충분하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둘, 의견을 마음껏 달라.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게 많고, 그래서 지금이 끼어들기 가장 좋은 때다. 틀려도 되고, 과감해도 된다. 원래 다 그렇게 시작한다. 무서워서 사리지 않아도 된다. 아무도 정답을 모른다. 나도 모르기에 같이 소통해야 한다.
준비할 게 많아서 한 번에 다 갖춰지진 않을 거다. 그래도 내 페이스로는 생각보다 빠르게 갈 거다. 그건 걱정하지 않는다. 크라우드 펀딩으로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는 기본 틀을 세워두고 싶다. 그 전까지, 먼저 와 있는 당신들의 손이 필요하다. 사실 크라우드 펀딩이 언제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한 달 정도 안에 커뮤니티를 준비하는 걸 목표로 한다. 잘 되면 좋겠다. 아무래도 사는 지역이 전부 달라서 언어적, 시간적 장벽이 조금 있지만 적극적으로 참여해주길 바란다.